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백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에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p.65)
1961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주도 하에 2차대전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아이히만은 유럽 전역에 퍼져 살던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해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그러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비록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지만) 유대인 이주 말살 정책을 "매우 성실"하게 수행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유대인 강제 이주 시행 업무는 짧은 시간에 아이히만을 하급 중대 지휘관에서 최고 중대 지휘관으로 승진시켰으며, 이후 상급 대대 지휘관에 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열정적으로 유대인 강제 이주와 관련된 능력(?)을 발휘한 결과,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 즉 유대인 조직과 시온주의 당파들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의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이주와 말살의 권위자로,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유대인 이주 학살에 있어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기에 그는 유대인, 나아가 인류의 적이자 악의 근원이었고
따라서 유대인들을 포함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이 재판에 집중되었다.
한나 아렌트 역시 유대인이자 정치철학자로서 이 재판에 관심을 가졌고 <더 뉴요커> 객원기자 자격으로 참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판기간 동안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악마라 하기엔 너무 평범(?)한 사람이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를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해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고,
내용이 다소 어렵기에 독자들이 쉽게 다가갈수 있도록 간략하고 핵심적으로 정리한 책이 지금 내가 후기를 쓰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기> 이다.
모든 정신과 의사가 진단했듯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정상이었다.
광기나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며 자신의 승진을 꿈꾸는 평범한 집단의 평범한 구성원이었다.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성실히 일하는 공무원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전형적인 악인으로 아이히만을 판단하고자 노력했지만, 아렌트가 보기에 그는 이제까지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악인이었다.
전례가 없는 악의 전형으로서의 아이히만,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잔인한 일을 하도록 만들었던가?
첫째는 아이히만의 비뚤어진 이상주의 이다.
아이히만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도덕관념과 양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방향은 자신을 향해 있었으며 그 외의 것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이익과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아이히만의 이상은 옳은 것을 지켜 나가기 위한 신념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존경하고 닮고자 했던, 삶의 본보기인 누군가로 결정되었고 그것은 하필이면 "아돌프 히틀러"였다.
아이히만은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따르게 되었고, 사유함의 무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말은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날때부터 태생적으로 있는 근본악, 근원적인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누구나 생각하기와 말하기를 거부하고 거기에 무능력하면 (극단적인 경우) 아이히만과 같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아이히만이 살고 있던 당시 시대 상황, 전체주의와 언어 조작을 통한 사유의 말살이다.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전체주의는 단순히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정도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 혹은 개인의 개성은 완전히 말살되고 거대한 조직의 부품, 하나의 사물로 전락한다.
따라서 사물화된 개인은 자유는 커녕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나'가 사라졌기에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또한 전체주의는 생각하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는 언어도 조작했다.
예컨대 '제거', '박멸', '학살' 같은 명백한 단어 대신 '최종해결책', '소개(疏開)', '특별취급'과 같은 직관적이지 않은 단어를 쓰는 것이다.
언어조작은 우리에게 익숙한 명백한 단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반성할 여지를 없애 버린다.
아이히만이 살던 시대는 인간의 사유를 철저하게 막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아이히만처럼 된 것은 아니다.
아이히만이 악마가 된 것은 결국 스스로 사유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사유의 거부이며,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기를 게을리 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관점을 유지하는, '불편부당함(impartiality)'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불편부당함은 자기 생각을 확장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 고려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의 외연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정신의 확장(enlargement of the mind)'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지사지' 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타인의 생각까지 고려하려면 아마도 두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첫째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은 거리를 두고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이해하게 해주고,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은 자기 일인 것처럼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다.
두번째는 아모르 문디(amor mundi), 즉 '세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나 외에 주변의 사람들, 나아가 이 세계를 사랑해야지만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노력이란 걸 하지 않을까. 아이히만에게 타인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과연 그런 명령이 떨어진다고 한들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까.
지금 이 세계를 봐도 곳곳에 혐오가 넘쳐난다. 비판할 수 있고 심지어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혐오라니.. 그것도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을 넘어 생명과 지구도 사랑하자는 시대인데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는 서로를 혐오하고 끝내 죽이기까지 한다.
혐오는 이제 그만. 다름을 제발 인정했으면 좋겠다. 나와 같지 않다고 없어져야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책을 다 읽고 나니 한편 씁쓸하고 가슴 한구석이 무겁다.
이런 엄청난 비극에 일조한 사람이 극악무도는 커녕 천박하기 짝이 없는 소시민이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다짐해본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무엇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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