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는 꽤 유명한 소변기(?)가 있다.
안쪽에 파리 스티커가 붙어있는 소변기인데, 남자들의 조준본능(?)을 자극해서 자연스럽게 소변이 밖으로 튀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티커 부착 후 소변이 밖으로 튀는 양이 80%나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다른 방법(예컨대 안내 문구 부착 등)을 썼다면 파리 스티커 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볼일을 보면서까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파리 소변기는 어떻게 80%라는 놀러운 성과를 거두었을까?
바로 "넛지의 힘"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넛지(nudge)란 원래 영어로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인데, 저자인 탈러는 책에서 넛지를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한다.
넛지는 선택 설계자가 취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
넛지를 설명하기 위해 탈러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어느 학교의 급식담당자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학생들이 몸에 좋은 음식(예를 들면 과일이나 채소)을 좀더 많이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데 학생들한테 막연하게 과일이나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만 하면 과연 많이 먹을까?아마 아닐 것이다.
그래서 담당자는 고민끝에 그날 급식메뉴의 위치를 바꾸어본다. 과일 채소를 먹기 편하게 좀더 가까운데 두고, 튀김 같은 음식은 멀리 두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건 튀김을 메뉴에서 빼는게 아니라 제공한다는 것이다. 단지 위치만 바꿀뿐)
그런데 놀랍게도 메뉴를 바꾸지 않고 그저 위치만 바꾸었을 뿐인데, 학생들은 과일 채소를 더 많이 먹고 튀김을 덜먹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우리도 부페에 가면 들어가서 가장 가까운 곳의 잘보이는 메뉴부터 담게 되지 않던가)
여기서 알 수 있는 넛지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튀김을 제공한다).
동시에 누구의 강요 없이 자연스럽게 (본인에게 또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는다).
탈러는 이를 두고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고 말한다.
즉,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되(자유주의) 어떤 행동방식을 취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합당하다(개입주의)는 신념이다.
이는 어떤 선택을 강요하는 강제주의 또는 어떤 간섭도 없이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방임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넛지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은 결코 합리적 인간(책에서는 말하는 "이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는 크게 2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숙고시스템으로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합리적이기 때문에 오류가 거의 없다. 즉 이콘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다른 하나, 자동시스템은 신속하고 직관적이며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오류가 많다.
문제는 우리들은 이콘이 아니기 때문에 숙고시스템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시스템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
자동시스템은 신속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인류가 진화하면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탓에 오류가 많고 비합리적이다(즉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결론을 내기 쉽다).
사람들의 이러한 자동시스템 사고방식 뿐만 아니라
집단에 동조하는 성향(집단 편향), 처음의 선택을 잘 바꾸지 않는(즉 디폴트값를 택하는) 경향 등 편향된 사고방식 때문에
합리적인 선택(즉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최선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앞서 예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약 이콘이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건강에 이로운 과일 채소를 위치와 상관없이 많이 먹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한 튀김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튀김의 먹는 양이 줄어서도 안된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이콘이 아니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메뉴의 위치만으로 먹는 양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넛지가 필요한 때는 과연 어떤 경우일까?
우리가 앞서 보았던 암스테르담의 소변기나 급식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는 하기 어려운, 그렇지만 유익한 행동을 유도해야 할 때 넛지가 필요하다.
즉 흡연이나 음주처럼 당장은 기분을 좋게 해줄지 몰라도 나중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자제하기 어려우므로 넛지가 필요하다.
또한 난이도가 높거나 빈도가 낮아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울 때도 넛지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저자는 넛지를 정책에 활용하는 사례로 저축을 증가시키거나 신용대출(모기지)을 개선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의료보험, 장기기증, 환경보호 등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넛지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장기기증의 경우 우리나라는 개인이 직접 사전에 장기기증을 신청한 경우에만 사후 장기기증을 받을 수 있지만
일부 국가의 경우 반대로 장기기증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본인이 사전에 직접 밝혀놓지 않으면 사후 장기기증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어 장기기증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즉 장기기증에 동의하는 것이 디폴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래도 신청주의인 우리나라보다 장기기증이 활성화될 것이고, 장기기증을 통해 사람을 살릴 가능성이 더 늘어날 것이다.
이런 점을 볼때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해 우리도 이렇게 제도를 바꿀 것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회 내부적으로 많은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장기기증에 대해 인식이 그닥 좋진 않은 것 같다).
제도를 바꾸건 바꾸지 않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이렇게 기본 선택지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사회가 얼마든지 더 바람직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 선택지를 만드는 선택 설계자, 제도를 만들고 관리하는 정부와 이러한 정부를 감시하는 의회, 시민단체 등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넛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새롭고 훌륭한 방식이다.
넛지 개념이 나온 후 이를 이용한 마케팅 또한 활성화되고 있지만(심지어 넛지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다크 넛지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 더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인지적 사고적 비합리성을 극복해서 함께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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