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위기의 정치학 - 군주론(IL PRINCIPE) / 마키아벨리
용맹(virtu)은 광포한 공격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 것이다. 전투는 짧을 것이니, 이탈리아인의 가슴에 조상들의 용맹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 Petrarca, Italia mia, verses 93-96 (책 p.181) |
<신곡>으로 유명한 시인 단테는 14세기에 그의 조국 이탈리아를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비참한 땅에서 피를 흘리는 아아 비굴한 이탈리아여.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선원이 없는 배여."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이 서린 땅 이탈리아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중심세력의 부재로 사분오열되었다.
11세기 유럽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등이 지역적 중심이자 거대한 상업도시로 등장하였으나, 지역적 중심이 되었을 뿐이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는 교황령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의 각축상태에 놓였다.
마키아벨리는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된 조국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통치역량과 군사력을 겸비한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책 <군주론>을 저술하였다.
군주의 모델로 처음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염두해두었으나, 체사레가 몰락한 이후 피렌체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게 되었다.
군주론에서 말하는 통치이념의 특징은 한마디로 '현실주의' 라 할 수 있다.
군주는 이상이나 도덕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변화하는 상황에 자유자재로 태도를 바꿔야만 한다.
즉 필요하다면 (이익이 된다면) 악한 행동도 할 수 있어야 한다.(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선한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악하게 보여서 시민에게 미움을 사서는 안된다.
시민에게 미움을 사면 시민은 군주에게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의 외양과 본질은 같을 필요가 없다. 실제로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하게 보이면 된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시민으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한다.(p.118)
시민이 군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면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하지만, 사랑을 느끼게 대할 경우 군주의 은혜를 잊고 군주를 배신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성악설적인 관점이 드러난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고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다."
군주가 은혜를 베푸는 동안 사람들은 온갖 충성을 바치지만, 정작 군주가 필요로 할 때면 등을 돌리므로 그들의 약속을 믿고 다른 대책을 소홀히 하는 군주는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인간 상호간의 배신과 모략을 자주 목격한 마키아벨리가 인간 본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군주론에서 제시한 또다른 중요한 개념은 "역량(virtu)"와 "행운(fortuna)"이다.
역량은 군사력을 포함한 군주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말한다.
역량은 갖추기 힘들지만 자신의 역량을 갖고 일단 군주가 되면 유지하기는 쉽다.
반면 행운은 외부 환경, 타인의 호의 등 역량을 제외한 각종 외적인 요소를 말한다.
행운은 성공한 군주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체사레 보르자 같은 군주는 역량이 있었음에도 행운이 따라주지 못해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다.
즉 성공하는 군주는 역량과 행운을 골고루 갖추어야 하며,
군주의 역량, 즉 행동방식은 그가 행동하는 상황과 부합해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이라는 책을 쓰며 강력한 리더를 갈망했던 까닭은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탓에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국가의 주된 토대는 (세습군주국이든 신생군주국이든 복합군주국이든) 좋은 법과 좋은 군대"라고 했다. 여기서 법은 관행(불문법)을 포함한 광의의 법제를 뜻하며, 군대는 법제를 유지시켜주는 무력이다.
좋은 사회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만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법과 군대를 통한 강력한 국가 시스템을 구축할 능력과 행운을 겸비한 군주가 등장하여
혼란의 시기를 끝내고 이탈리아 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길 바랐다.
지금 시대에 군주론에서 얘기하는 리더의 미덕(시민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는 등)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법과 강한 군대, (온정에 끌리지 않는) 엄정한 처분, 상황에 적합한 대처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리더를 선출하고, 선출된 리더가 국가 시스템을 잘 유지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이제는 시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